<2016-10-15 격주간 제839호>
[이달의 착한나들이] 필리핀에서 마젤란을 만나다
맹그로브 숲 사이로 마젤란 함대의 깃발이 보이는 듯했다.

여행이란 책 속에 그려진 낯선 과일 같은 것이다. 직접 만지고 입안에 넣고 씹어보는 그 생생함을 위해 길을 떠난다. 나는 필리핀 막탄 슈라인공원에서 최초로 세계 일주를 한 마젤란을 만났다. 책 속에만 존재했던 아득한 대항해 시절을 만난 것이다.
바다 끝이 낭떠러지로 되어 있다고 믿었던 시절, 목숨을 걸고 선박 5척과 선원 27명으로 망망대해에 나선 사람, 그는 이곳 막탄에서 죽었다. 추장이었던 위대한 영웅 라프라프에 의해 갈가리 찢겨 죽은 것이다. 공원에는 마젤란의 기념탑과 라프라프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나라를 지킨 사람도 쳐들어 온 사람도 같이 공존하는 것이다. 나는 적을 적으로 규정하지 않는 그들의 문화가 낯설었다. 어떻게 이순신 장군과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함께 모실 수가 있는가? 게다가 그들은 침략자인 마젤란을 존중한다. 이유는 가톨릭을 전해주었다는 것. 공원은 마젤란과 라프라프가 싸운 바닷가에 있다. 바다를 바라보니 맹그로브 숲 사이로 마젤란 함대의 깃발이 보이는 듯했다.
마젤란이 첫발을 내디딘 곳은 필리핀 세부였다. 마젤란은 선교활동에 많은 공을 들였는데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피정복자들을 안정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수단이다. 당시 세부의 원주민들은 어마어마한 스페인 함대와 키가 크고 얼굴이 하얀 유럽인들을 보고 놀랐다. 자기들이 믿는 신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신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선교는 급격히 확산됐고 필리핀은 동남아에서 유일한 가톨릭 국가가 됐다.
나는 마젤란이 세부의 왕비에게 선물한 인형을 보러갔다. 그 인형은 유럽 인형이었는데 얼굴만 검었다. 이상해서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필리핀 사람처럼 검은 칠을 해서 선물했다는 것이다. 그 인형은 현재 세부의 가장 오래된 성당 산토니뇨성당에 모셔져 절대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놀랍게도 아기인형을 보려는 줄은 끝이 없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성당 중앙에 그 인형의 그림이 예수님보다 위에 그려져 있는 것이다. 인형은 필리핀으로 와 아기예수가 됐다. 이런 일들로 로마교황청에서는 오랫동안 가톨릭 국가로 승인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보았다. 묻지 않고 믿는 최상의 믿음을.
성당 옆엔 마젤란이 세운 십자가가 있다. 필리핀 최초로 가톨릭 신자가 된 추장과 마을 사람들에게 세례를 준 기념으로 만든 십자가다. 그러나 이 십자가를 세운 지 일주일 후 막탄의 전투로 마젤란은 죽고 만다.
그러나 마젤란은 죽지 않았다. 아기예수인형도 그가 세운 십자가와 라프라프와 싸우다 죽어간 기념비도 이곳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 정복자인 마젤란 덕분에 수많은 관광객이 이곳으로 몰려온다. 그러나 그들은 마젤란의 필리핀 발견으로 스페인, 미국, 일본의 식민지로 수백 년을 견뎌야 했다.
흔히 필리피노들은 정체성이 모호하다고 비난받는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파란만장한 역사를 살아낸 자의 깨달음인지도 모른다. 긴 세월 적과 동침한 사람만이 터득할 수 있는 경지로서 살아남으려면 규정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적으로 규정해버리면 공멸의 위험이 커진다는 것을, 필리핀을 다녀와서 공존과 융합에 대해 생각해본다. 〈김금래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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