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6-15 격주간 제855호>
[이도환의 고전산책] ‘하늘’은 어디에 있는가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
獲罪於天 無所禱也(획죄어천 무소도야)
- 《논어(論語)》 중에서"


유학(儒學)에서의 ‘하늘(天)’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하늘(sky)’과 그 의미가 조금 다르다.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獲罪於天 無所禱也)”는 공자의 말을 살펴보자. 하늘에 죄를 지었으면 하늘에 빌면 될 텐데, 공자는 그게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왜 그럴까. 도대체 ‘하늘’은 무엇인가.
 천(天)은 대(大) 위에 한 획을 더 그은 글자다. 대(大)는 사람의 모양을 차용한 것이므로 천(天)은 사람보다 위에 위치한 그 무엇이다. 그러므로 이를 신(神)으로 파악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공자는 철저한 현실주의자로 추상적 개념인 신(神)을 말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늘에 순응하면 살아남을 것이요, 하늘을 거역하면 망할 것이다(順天者存, 逆天者亡)” 맹자의 말이다. 도대체 하늘이 무엇인데 순응하고 거역하는가. 맹자의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천명(天命)’이라는 개념을 가져와야 한다. ‘하늘의 명령’이라 번역하기도 하는데, 그 명령을 따르면 살아남고 그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망한다는 것이다. 
 ‘천명(天命)’이라는 개념은 주(周)나라 시절부터 사용되었다. 중국은 극히 평화스러웠던 요순(堯舜)시대를 거쳐 홍수를 잘 다스린 우(禹)가 왕위에 오를 때까지 태평성대를 구가한다. 당시까지 왕의 부자세습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다만 현명하고 바른 사람이 왕의 자리를 물려받는 구조였다. 그러나 우(禹)가 세운 하(夏)나라 이후부터는 우(禹)의 자손들이 대를 이어 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 17대째 왕위에 오른 걸(桀)은 정치를 엉망으로 하여 민심을 잃게 되고, 이후 탕(湯)이 걸을 몰아내고 새로운 나라를 세웠는데 그것이 상(商)나라다.
탕(湯)은 우(禹)와 달랐다. 우는 전임 왕이었던 순으로부터 평화롭게 왕위를 물려받았으나  탕은 전임 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권력은 잡았지만 우와 비교하면 그 명분이 그렇게 강하지 못했다. 이러한 아픔을 이기기 위해 상나라는 점술(占術)에 의지했다. 흔히 말하는 ‘하늘의 뜻’ 혹은 ‘하늘의 명령’을 내세우기 위해 점을 쳐서 그 결과를 가지고 명분을 취하려 했던 것이다. 거북이 등껍질이나 소의 뼈를 이용해 점을 치는 것에서 파생된 갑골문자(甲骨文字)의 시작이 상나라였음을 생각한다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그러나 점술로 나라를 이끄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상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紂)가 포악한 정치를 이어가니 결국 민심을 잃었고 이에 무왕(武王)이 나타나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주(周)나라를 건국한다. 무왕은 “상나라는 천명(天命)을 잃었고 이제 주나라가 천명(天命)을 받아 새 나라를 건설한다”라고 주장하며, ‘명(命)을 바꾸었다’라는 뜻으로 ‘혁명(革命)’을 이야기했다. 주나라는 ‘천명(天命)’이라는 개념은 가져와 명분으로 삼았고, 주나라를 이상향으로 생각한 공자는 이를 이어받았다. 그러므로 공자가 말한 ‘하늘(天)’은 주나라가 내세운 ‘천명(天命)’에 등장하는 ‘하늘(天)’과 연결된다.
 상나라의 하늘이 주술적인 것이었다면 주나라의 하늘은 실용적인 것이었다. 주나라의 하늘은 백성들을 뜻했다. 민심(民心)을 잃으면 천명(天命)이 떠났다고 말하고 민심(民心)을 얻으면 천명(天命)을 받았다고 했기 때문이다. 동학에서 말하는 ‘인내천(人乃天)’의 뿌리가 이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인들은 이기적이지만, 끼리끼리 모이면 이기적이지만, 서로 다른 개인들이 자연스럽게 하나로 일치된 의견을 보이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하늘의 뜻’이 된다. ‘상서(尙書)’를 보면 더욱 확연해진다. “하늘은 백성의 눈으로 보고, 백성의 귀로 듣는다(天視自我民視 天聽自我民聽)”
〈이도환 / 아동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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