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8-15 격주간 제835호>
원로지도자의 4-H이야기 ‘만경(萬頃)’⑭

전국에서 움트는 4-H와 지방지도요원들의 서러움

연포(燕浦) 강 건 주 (한국4-H본부 고문)

4-H와 농사교도사업(7-2)

농사교도사업(Agricultural Extension Service, 농촌지도사업을 영어로 세계 공통어로 사용. 우리나라는 농촌지도 - Rural Guidance 혹은 Rural Developme nt Administration, 일본 - 농사보급 Ag. Dissemination, 여타 나라들 Rural Development - 농촌개발, Ag. Improve ment - 농사개량, Rural Promotion - 농촌진흥, Rural Education - 농촌교육계몽)은 각기 자국 실정에 알맞게 조직과 기능을 채택해 실행하고 있다.
농사교도사업이 1914년 미국에서 처음 실시된 이후 여러 나라들은 자국의 농촌발전을 위해 유사한 발전 모델을 도입했으나, 미국의 민주적 사회와 상위된 계몽형태사업을 모방했다(예 : 일본 군국주의와 관료주의 농촌운동인 새부락건설운동, 영국은 1940년대에 후진 식민지 개발사업으로 지역사회개발 - Community Development Program을 적극 전개했음. 1950년초 UN과 미국이 한국 지원사업으로 C.D.를 1957년부터 1962년까지 잠시 실행하다 농사교도법 공포와 함께 농사원에 흡수된 바 있다). 우리 농사교도사업의 태동은 1947년 12월 미군정 당시(과도정부령 제260호, 농업기술교육령 공포) 전개하려 했다. 하지만 우리 파트너들의 무경험으로 국립농사개량원을 설치하여 미국식 겉모양(농과대학, 농업시험장, 교도국 통합)만 차리고 말단에 시군 농사교도소를 설치토록 했다.
문제는 우리 현실에 부합되지 않았다. 비민주적 사회 구조와 중앙집권적 정부체제는 지방비 연출에 어려움이 많았고, ‘시스템’ 자체가 우리 체질에 맞지 않았다. 그나마 동년 2월까지 중앙을 비롯하여 각급 행정기관에 조직과 인사배정(행정적 연락 업무 정도)을 완료해 형식적으로나마 일차로 말단 군소장급 150명을 대상으로 단기 강습(1주일)을 개최했다는 것은 역사에 기록될 사항이었다. 강습은 교도이념, 교도방법, 4-H운동에 대한 간단한 윤곽 정도만 소개됐다.
하지만 이들은 귀향 후 위정자, 정치인, 사회적 망각 속에서도 멸사봉공(滅私奉公), 오로지 농촌부흥을 위해 굳은 신념을 갖고 부락에서 4-H소개와 농촌지도의 개척자(보수도 없었음)로 활동했다.
후일(1951년 후) 이들은 4-H운동 전국 확대사업에 대들보와 같은 역할을 했음을 만경생은 지금도 기억한다. 뒤이어 그해 6월에 개최된 읍면 교도원 2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시·도 단위 연장 단기훈련생(이들 역시 몇 년간 무보수 상태)도 후일 귀중한 지도인력자원으로서 활용하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처사였다.
한편 경기도 농촌청년구락부(4-H) 연합회는 발족과 동시에 조인섭(趙仁燮, 천일백화점 사장이 농지 약 27만㎡을 기증) 사장의 특별 지원으로 사단법인으로 등록되어 도 지원금과 연합회의 민간 재정 지원과 기술협조를 받아 6.25한국전쟁 직전까지 도내 25개 시·군에 56명의 유급 4-H전임지도자를 배치해 활동했다.
지금 우리가 가열차게 부르는 ‘4-H 노래’ 작사는 김갑영(경기도 4-H지도자, 작곡은 이대 출신 김갑영 씨 부인 친구가 협조) 선생이 설정, 1947년 10월부터 공식화 됐다.
1951년 봄, 한강 이북에서 UN군과 중공군은 일진일퇴의 피나는 격전을 전개했다. 3월 말 서울은 재탈환된다. 만경생은 한국4-H사업(UNCACK 근무, 농사교도사업 설정도 포함)이라는 매력적인 업무에 참여한다. 매우 영광스러웠다. 무거운 사명감을 느꼈다. 이때 한 미국인(50세 중반, 노스캐롤라이나 주, 전공은 임과, 일본 점령군사령부 GHQ 소속 규슈지구 군정청 소속) 이름은 Shally(애칭)가 매월 2회, 2~3일씩 일본에서 주로 4-H 복구와 전쟁으로 파괴된 농촌 실태 파악에 일본과 한국을 왕래했다. 이후 3년간 그는 만경생과 함께 업무에 임했다. 만경생에게 농사교도사업 개인 교수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는 일본말을 유창하게 하는 몸이 큰(체중 130kg, 키 190cm 정도) 사람이었다. 만경생이 농사교도사업 실무 전과정과 부분적인 농사기술도 그에게서 전습 받을 수 있었다. 그는 1954년 1월 일본에 귀환 후 애석하게도 심장마비로 불귀객이 됐다. 그는 만경생에게 귀중한 농사교도사업 표어 한 구절을 남겨놓고 갔다.
‘조용한 연못에 작은 돌을 하나 던지니 작은 파동이 점점 널리 퍼진다!(Cast a small pebble at the calm pond a small wave expanding and grow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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