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5-15 격주간 제829호>
[이 달의 착한나들이] 망우리공원에 가다
한국인이 관리하고 있는 단 하나의 일본인 묘지.

우리는 살아가면서 내 손톱 밑의 가시처럼 상대방의 아픔을 느낄 수 없다. 그런 이유로 우린 남에게 상처를 주고도 진심어린 용서를 구하기가 어려운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전 세계가 보는 앞에서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무릎을 꿇은 사람이 있다. 그는 독일 4대 총리 빌리브란트다. 그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나치에 희생된 수많은 영령에게 참배하던 중 무명용사의 비석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울었다. 그 이유는 이렇다. “나는 인간이 말로써 표현할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행동을 했을 뿐이다.”
며칠 전 문학인들 주선으로 망우리공원에 갔다. 망우리는 1933년 일제시대에 조성된 공동묘지였지만 지금은 시민 공원으로 탈바꿈하여 삶과 죽음을 성찰하는 인문학적 공간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묘지를 둘러보노라니 유명인이나 무명인이나 모두 비문을 가지고 있었다.
이중섭은 화가로, 방정환은 아동문학가로, 한용운은 독립운동가와 시인으로, 지석영은 국어학자로, 조봉암 선생은 정치인으로, 박인환은 시인으로 〈목마와 숙녀〉가 새겨져 있었다. 결국 사람은 죽어서 무었을 했는가가 남는 것이다. 그 중에 눈길을 끄는 일본인 무덤이 하나 있었다. 이름은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 그의 비문은 이랬다.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그 사람은 일제총독부 임업연구소 직원이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의 목재 수탈로 황폐해진 조선의 산이 안타까워 ‘오엽송 노천매장법’이라는 양묘법을 개발해 조선의 푸름을 되찾아주었으며 경기도 광릉의 수목원도 그가 시작한 결실이었다. 그는 한복에 망건을 쓰고 살았으며 구걸하는 청년을 관공서로 데려가 일거리를 부탁하고 봉급을 쪼개 가난한 아이들을 공부시켰다. 특히 일본인들이 조선의 문화가 중국 아류라고 주장하자 그는 ‘조선의 소반’이라는 책을 써 조선 문화의 독자성을 변론하고 “피곤에 지쳐 있는 조선이여, 다른 사람 흉내를 내기보다 갖고 있는 중요한 것을 잃지 않으면 멀지 않아 자신에 찬 날이 올 것이다. 이것은 공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라는 문장을 써 국경을 초월한 사랑을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노력으로 1924년 조선민족미술관이 건립되었다. 당시 조선은 굶는 게 다반사라 문화고 산림녹화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지만, 그는 지식인으로서 우리 문화의 말살을 진심으로 근심했던 것이다.
그는 식목일 준비를 하다 급성폐렴으로 죽는다. 그는 나무를 심으러 조선 땅을 돌아다니며 백성의 참담함을 보고 미안한 마음에 몇 번이나 일본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는 그의 유언대로 조선식 장례를 치르고 조선에 남아 조선의 흙이 되었다. 그의 장례식 날은 비가 쏟아지는데도 불구하고 조선 사람들이 몰려와 길이 막혔으며 서로 상여를 메겠다고 다퉈 이장이 구간별로 나누어 메게 했다. 그는 남의 상처를 자기 상처처럼 아파한 사람이다. 그도 독일 총리처럼 인간이 말로 다 할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행동을 한 것일까.
나는 오래 우울했다. 나는 옳은 일을 위해 행동하는가? 나의 죽음을 이토록 슬퍼해 줄 사람이 과연 있기나 할까? 〈김금래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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