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4-H와 앤더슨(4)
연포(燕浦) 강 건 주 (한국4-H본부 고문)
앤더슨의 즉흥적인 분노는 만성적이었다. 아마도 그의 오랜 군생활 습관이라 이해된다.
한편 기증된 4-H과제용 미국 가축들(1955~56년 기증된 젖소와 돼지)의 사육 실태는 미국의 근대화된 사육 방식과 비교하면 우리 농촌에 배분된 후에는 반 원시적 상태로 사육되고 있었다. 비위생적이며, 비과학적인 소, 돼지 사육 방식을 우리는 단군 이래 계속해 왔던 것이다.
앤더슨이 마을 현지 4-H를 방문해 그가 미국에서 기증받은 소중한 가축들이 한국 농가에서 ‘옥중 고문 생활(?)’하는 상태로 사육되며 높은 폐사율과 질병에 시달리는 미국 돼지(한국 가축들도 매 한가지였지만)들의 안타까운 한국에서의 신세를 목격하게 된다.
미국 농장에서는 좋은 농축산 사료와 위생적인 환경에서 사육 후에 근 2개월여에 걸쳐 태평양을 건너 온 후 반 원시적 환경 속에서 사육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답사하는 현지 마을에서는 많은 마을 사람들이 운집한 가운데 젖소를 잡고, 죽지 못해 배고픔에 소리를 지르는 돼지를 보게 되면서 현장에서 돼지를 가리키며 격노했다.
젊은 4-H회원들과 그들의 부모들에게 차마 우리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욕(辱)과 수치(羞恥)를 퍼붓는 것이었다. 한 4-H회원 부모는 참다못해 “이봐요, 돼지는 돼지지. 그냥 도로 가져가요.”하며 큰소리로 대꾸하기도 했다.
격분한 우리 농민의 불만 대꾸인 것이다. 앤더슨은 여러 번 돼지를 강제로 몰수한 적도 있었다. 서울 면목동 근방에서 강제로 가져간 경우도 있었는데, 만경생은 그 행정적 후속처리에 해결사 역할을 하느라 귀중한 시간을 많이 소비했다.
만경생은 ‘이것이 아닌데…?!’하며 당혹했다. 그는 농촌지도 방법엔 문외한이었다. 만경생은 우리가 하는 ‘사업’이 무엇인지, 앤더슨에게 정중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우리는 ‘4-H교육사업’을 하기 위해 이 소중한 가축들을 4-H과제로, 즉 ‘교육적 목적’을 위해 ‘활용’ 하는 것이니 그리 이해하고 가축사육 개선책을 비민주적 강압적인 이런 식으로 지도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니 강습회 등을 개최하여 최신 사육기술을 전달(물론 개인 접촉과 대중 접촉을 포함하여, 농촌지도 방법 활용)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접근 방법(당시에는 농사교도사업 미실시)이라고 설명하여, 결국 서울 정동 우유협동조합(서울대 수의과대와 서울시 농림과 후원)에서 수차례 4-H축산강습회(일반 양축농가도 참석)를 개최하게 되었다. 반응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반면 앤더슨의 한국4-H에 대한 물심양면의 지원(한미재단 재원)이 우리 4-H에는 큰 도움이 되었다. 4-H장학제도, 4-H지도자강습회 지원, 4-H농공훈련 시설 지원, 4-H경진대회 지원 등 1970년대 후반까지 많은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자고로 위인은 공(功)과 과(過)가 많은 법, 앤더슨의 한국4-H 사랑은 영원했다. 앤더슨의 세 번째 체한(滯韓) 8년간은 1961년에 끝났다. 그는 마지막 2년은 주로 해외에서 보냈다.
만경생이 앤더슨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미국 그의 자택에서였다. 1967년 10월이었다. 그는 파킨슨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만경생은 당시 캐나다 토론토에서 개최된 UN FAO와 캐나다 정부 공동주최 4-H식량세계회의에 참가하고 귀국하던 길이었다. 우리 두 사람은 얼싸안고 서로 눈물로 두 손을 굳세게 마주잡았다. 마지막 살과 살의 접촉이었다.
앤더슨은 3층에 많은 한국 골동품과 4~5품의 제법 큰 한국 저명화가의 작품이라는 호랑이 액자를 여기 저기 걸어놓고 있었다. 지난 날 한국인들은 ‘앤디’를 ‘호랑이 지사’, ‘4-H호랑이’라 애칭(?)했으니, 마침 그 한국 호도(虎圖)와 대비되었다.
만경생이 ‘앤디’의 작고 소식을 접한 것은 1973년 늦봄이었다. 한국4-H 전성기에 그는 조용히 갔다. 자식도 없이 홑몸 살이 한 그의 부인(도서학 전공, 앤디보다 한국 사랑이 더 컸음)은 전 재산을 그의 고향에 설립한 ‘앤더슨 도서관’에 기증하고, 1994년에 그녀가 사랑했던 ‘호랑이 앤디’ 곁으로 영원히 자리를 함께 했다.
1995년 여름, 만경생은 재도미시 네브래스카주 비아트리스 시장(앤디의 출생지이자 묘지 소재지)을 통해 여러분들의 따뜻한 감사의 화환을 고인이 된 앤디에게 전달한 바 있다. ‘Andy we’ll never forget you! Rest in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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