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1-01 격주간 제868호>
[지도자 탐방] ‘빛나는 흙의 문화’를 삶으로 일궈낸 진정한 4-H인
이 기 형 회장 (경기 여주시4-H지도자협의회)

이기형 회장은 희망과 사랑이 넘치고 살맛나는 농촌을 만들기 위해 4-H후배를 양성하는데 힘쓰고 있다.


4-H를 통해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지역사회에 헌신하고 있는 이기형 여주시4-H지도자협의회장(55·경기 여주시 금사면 금사1길)을 만났다. 이 회장에게서는 흙냄새가 물씬 풍긴다. 그와 악수를 나누면서 4-H노래의 “빛나는 흙의 문화 우리 손으로”라는 가사가 문득 떠올랐다. 남한강을 끼고 있는 금사1리에서 태어난 그는 한번도 이 마을을 떠나본 적이 없다. 그저 묵묵히 땅을 일궈 지독한 가난을 떨쳐내고 살기 좋은 마을, 더불어 사는 여주시를 만드는데 땀을 흘렸다.

4-H정신으로 지독한 가난 물리쳐

“저는 어린 시절에 놀 시간이 별로 없었습니다. 소풀 베고 산수유와 땅콩을 까며 밤낮으로 일을 했지요. 친구들이 딱지치기, 구슬치기, 팽이치기, 썰매타기를 하며 노는 모습을 보면 참 부러웠습니다.”
이 회장은 열여섯 살에 마을4-H회에 가입했다.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친구들과 마을가꾸기에 대해 머리를 맞댔다. 마을청소, 꽃길조성, 추석명절 마을노래자랑, 설날 윷놀이 등의 활동을 펼쳤다. 그러면서 집안일도 더 열심히 했다. 봄에는 벼 모종 심부름, 소 풀베기, 참외 모종심기를 했다. 여름에는 논에 잡풀을 뽑고 참외 수확하고, 가을에는 벼 베기, 탈곡, 콩과 배추를 수확해 소득을 올렸다. 겨울에도 땔감하기, 풋나무치기 등으로 바빴다.
그때 그는 가만히 자신의 경제상황을 수치로 계산해 보았다. 열심히 한해 농사를 지어 농협에서 빌린 영농자금 50만원을 갚고 나면 남는 게 하나도 없었다. 남에게 빌린 돈 30만원도 그대로 있었다. 어떻게 하면 부채 없이 살 수 있을까? 고민 끝에 수입은 늘리고 지출을 줄이는 5개년계획을 세웠다. 4-H과제활동을 하고 남는 시간에는 남의 집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결과 20세가 되던 해에 부채를 모두 갚을 수 있었다고 한다.
남의 빚에서 자유로워진 그는 4-H활동에 전념하며 리더십을 기를 수 있었다. 금사면4-H회 부회장을 거쳐 회장을 맡으면서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관내 각 마을을 깨끗하고 아름답게 가꾸는 사업을 추진했다. 그 결과 연말 경진대회에서 과제발표, 무게측정, 오락경진, 농기계경진에서 각각 1위에 입상했다. 또 3명이 모범표창을 수상하는 영예를 거둬 종합우승을 차지했다.
이때 그는 박준선 새마을지도자 그리고 형제처럼 지내는 몇몇 동료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의 삶에 든든한 동반자가 된 사람들이다. 이들은 밤마다 모여서 ‘어떻게 하면 우리 농촌이 잘 살까?’, ‘어떻게 하면 우리 마을이 잘 살까?’ 하는 토론을 거듭했다. 새벽까지 대화를 나누다보면 날이 훤하게 밝아올 때도 있었다. 이 회장은 군4-H연합회 부회장을 맡아 읍면의 모범4-H회를 순회했고, 여름에는 야영교육과 가을에는 경진대회를 주관했다.
그러는 동안 소도 한 마리 두 마리 늘어나 축산의 꿈을 갖게 되었다. 경운기를 구입해 농사일도 훨씬 수월하게 되었다. 노인이나 어려운 농가의 일손을 돕는 것도 큰 기쁨이었다. 그는 그 자신이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4-H에서 만난 네잎클로버의 꿈을 하나하나 이뤄가고 있었던 것이다.

제13회 한농연전국대회 성공적으로 추진

이기형 회장은 1985년에 농업인후계자로 선정되어 처음 자신의 손으로 3300㎡의 땅을 구입했다. 소값파동을 겪었으나 오히려 땅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도경진대회에 출전해 과제발표를 하며 자신의 역량을 키웠다. 그러면서 새마을지도자가 되었고 서른한 살의 나이에 결혼해 가정도 이뤘다. 아내와 함께 직접 꿈에 그리던 집도 지었다. 트랙터와 콤바인도 구입하고 표고버섯도 재배하는 등 영농규모도 제법 확장되었다. 너무 열심히 일하던 중 콤바인이 굴러 죽음의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마을 이장을 맡아 여주군 최초의 기록을 세워나갔다. 마을단위 최초로 건강관리실, 천연잔디운동장, 어린이놀이터, 마을식당을 만들었고, 벼 건조기를 들여놓았으며, 마을리민의날을 제정했다. 더 큰 일은 1억원의 장학재단을 설립해 못 배운 한을 후배들에게 물려주지 않게 된 것이었다.
한국농업경영인 금사면회장을 시작으로 군연합회 부회장, 군회장 등을 맡아 농업과 농촌의 발전을 위해 발벗고 뛰었다. WTO, FTA 반대를 위해 홍콩시위에 참가하는 등 산업화에 밀려 어려워진 농업인의 권익을 높이기 위한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2012년 그는 제13회 한농연전국대회를 여주에 유치에 5만5000여명이 참가하는 역대 최대의 행사로 치러냈다. 군농단협회장을 맡았을 때는 진상명품축제를 개최하는 등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역할을 담당했다. 물론 농업관련단체와 4-H의 도임원도 맡아 다방면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그가 맡은 여러 직책 가운데서도 4-H에 대한 애정이 가장 크다. 여주군4-H지도자협의회 부회장을 거쳐 회장으로 있으면서 후배들에게 경험담을 들려주며 용기와 희망을 전해주고 있다. 어떻게 하면 청년농업인4-H회원들과 학생4-H회원들에게 4-H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고민한다.
이기형 회장은 “4-H후배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고 격려해 더 큰 발전을 이룰 수 있도록 힘쓰고 있다”면서 아울러 “나 자신도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하면서 끝까지 모범을 보이겠다”고 겸손하게 말한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묵묵히 4-H정신을 실천해 온 이기형 회장. 한국4-H운동 70년사에 감춰진 진주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조두현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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