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2-15 격주간 제847호>
[이달의 착한나들이] 노을빛 치마, 하피첩을 만나다
하피첩 속에서 또 다른 보물을 발견했다.

며칠 전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정약용 선생의 하피첩을 보러갔다. 하피첩은 정약용 선생 고향인 양수리 두물머리 근처에 있는 실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었다.
정약용은 조선이 낳은 천재였지만 불운한 사람이었다. 22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정조의 지극한 총애 속에서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쇄신하려 했지만 정조의 죽음과 함께 신유사옥이라는 사건에 휘말리면서 그의 정치적 생명도 끝이 난다.
당시 탄압 받던 천주교 신자라는 죄명으로 형과 매부는 사형을 당하고 둘째 형은 강화로 유배되어 죽고 자신도 18년 동안 강진으로 귀양 가면서 집안은 폐족이 되어버린다.
그는 형 둘과 매부를 그렇게 잃었고 어머니는 9살에 돌아가셨다. 자식 아홉을 두었는데 여섯이 병으로 죽고 아들 둘과 딸 하나만 남는다. 그는 사랑했던 아내와 아이들을 18년 동안이나 만나지 못했다. 종교의 자유가 있는 지금 돌이켜보면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피첩은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정약용이 귀양살이를 하고 있을 때 예식날 입었던 색이 바랜 다홍치마를 아내가 보내온 것이다. 정약용은 치마를 잘라 소책자 4권을 만들어 아들들에게 보낸다. 아비가 곁에 없어도, 폐족이 되어 벼슬을 못해도, 꿋꿋하게 살아가길 빌며 교훈을 적은 글이다. 시집가는 딸에게 보낸 매조도도 있었다. 매화나무에 앉아있는 새 두 마리와 딸의 행복을 비는 시를 적은 것이다. 그 딸은 헤어질 때 8살이었다고 한다. 아내의 치마에 남편이 글을 쓴 하피첩. 그러나 하피첩의 운명도 기구했다. 자손들이 간직하다 6.25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이 된 것이다. 그러나 하피첩은 전란 속에서도 살아남아 극적으로 우리에게 돌아온다. 폐지를 줍는 할머니의 리어카에서 3권이 발견되어 2014년 KBS 진품명품에 나온 것이다. 그때의 감정가는 일억원. 그 후 7억5000만원으로 국립민속박물관에 낙찰되었다. 그리고 노을빛 치마는 보물이 되었다.
나는 하피첩 속에서 또 다른 보물을 발견했다. 거기엔 내가 늘 궁금해 했던, 왜 나쁜 사람은 복을 받아 잘 살고 선량한 사람은 못사는가? 그렇다면 착하게 살 이유가 없지 않은가에 대한 해답이 씌어있었다. ‘화와 복의 이치는 옛사람도 의심한 지 오래 되었다 충신과 효자가 반드시 화를 면하는 것도 아니며 악하고 방종한 자가 반드시 박복한 것도 아니다 그래도 선을 행하는 것이 복을 받는 것이므로 군자는 힘껏 선을 행할 뿐이다.’ 이 글을 읽고 나는 깨달았다. 결국 선을 행하는 것이 복을 받는 일이며 복은 당대에 잘 먹고 잘 사는 것만이 아니라는 걸.
그는 사후에 한국 최대의 실학자가 되었고 죽은 지 74년 만에 문도공이란 시호를 받는다. 하피첩은 21세기 우리나라의 보물이 되었고 그가 수원에 건축한 화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그가 지은 ‘목민심서’는 베트남의 지도자 호치민이 가슴에 품고 다닐 정도로 공직자의 청렴한 자세를 강조한 명저로 남아있다. 그의 아들들도 나중에 벼슬길에 올랐다. 그는 영원히 복을 받는 비밀을 알고 있었다. 그는 평생 청렴을 최고의 선으로 생각했고 오직 백성이 잘사는 나라를 꿈꾸다 죽은 것이다. 
 〈김금래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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