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15 격주간 제915호>
[이도환의 고전산책] 엉킨 실타래를 푸는 방법
"훌륭한 농부는 홍수나 가뭄 속에서도 밭갈이를 멈추지 않는다
一良農不爲水旱而輟耕(양농불위수한이철경)"
- 《경사강의(經史講義)》 중에서


조선의 22대 왕, 정조(正祖)는 자신의 아버지인 사도세자(思悼世子)가 비극적으로 죽은 이후 아버지를 대신하여 왕위에 오르기까지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을 때 정조의 나이는 11세였다. 아버지가 죄인이 되어 사망했기에 죄인의 아들을 왕의 자리에 앉힌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조선 왕실은 어린 정조를 효장세자(孝章世子)의 양아들로 보낸다. 효장세자는 사도세자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사도세자의 배다른 형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변화와 충격을 견뎌낸 정조는 1775년, 영조(英祖)를 대신해 대리청정을 하다가 1776년 영조가 승하하면서 25세로 왕위에 올랐다.
이 과정에서도 그의 왕위 계승을 반대하는 세력은 방해공작을 전방위로 자행했다. 정조를 비방하는 내용의 투서가 이어졌고 정조가 거처하던 존현각에 괴한이 침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조는 모든 어려움을 뚫고 왕위에 올랐고 개혁 정책 및 탕평을 통해 대통합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정조는 즉위한 해인 1776년 3월에 규장각을 설치할 것을 명하였다. 왕실의 도서관이라는 목적에서 출발한 규장각이었지만 정조는 이곳을 차츰 학술 및 정책 연구기관으로 변화시켰다. 정조는 당파나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젊고 참신하며 능력 있는 젊은 인재들을 규장각에 모아 개혁정치의 파트너로 삼았다. 정약용을 비롯한 걸출한 학자들이 많이 양성되었는데, 특히 박제가·유득공·이덕무·서이수와 같은 서얼 출신들도 적극 기용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정조는 규장각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해 당대 최고의 인재들을 이곳에 발탁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관직이 높은 신하라도 함부로 규장각에 들어올 수 없게 함으로써 외부의 정치적 간섭을 배제했다. 그리고 직접 그들과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며 그 내용을 책으로 묶었는데 그 책이 바로 《경사강의(經史講義)》다.
“훌륭한 농부는 홍수나 가뭄 속에서도 밭갈이를 멈추지 않는다(良農不爲水旱而輟耕) 하였고 훌륭한 장사꾼은 밑진다고 장사를 그만두지 않는다(良商不爲折閱而輟市) 하였듯이, 군자도 세상이 혼란스럽다고 해서 일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君子不爲世亂而怠於事).”
《경사강의(經史講義)》에 나오는 정조의 말이다. 정조가 이 말을 한 까닭은 《시경(詩經)》에 나오는 다음 작품 때문이었다.
“북풍이 차갑게 불고 눈이 펑펑 쏟아지네. / 사랑하는 이와 손잡고 함께 떠나리. / 머뭇거릴 필요가 없네, 어서 빨리 길을 나서야지.”
이 시(詩)를 읽은 정조는 “북풍과 한설로 비유되는 난세에 나라를 구제할 방도는 찾지 않고 자신만 살겠다고 나라를 버리고 떠나는 것이 옳은가? 홍수나 가뭄이 든다고 농부가 일을 멈추지 않는 것처럼, 이익이 박하더라도 상인이 장사를 멈추지 않는 것처럼, 군자라면 난세라 하더라도 자신의 소임을 다해야 하는 것 아닌가? 뿐만 아니라 그런 어려움이 닥치지 않도록 미리미리 방비해야 마땅하지 않는가?”라고 말하며 함께 공부하던 학자들에게 열변을 토했다고 한다.
많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강한 의지로 왕위에 올랐으며 왕이 된 이후에도 개혁을 멈추지 않았던 정조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실타래처럼 엉킨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고 손을 놓고 도망가서는 안 된다. 그런다고 엉킨 실타래가 풀리는 것은 아니다. 엉킨 실타래를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는 용기를 갖는 것이 해법의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도환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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