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15 격주간 제917호>
[이도환의 고전산책] 세종대왕의 여론조사

"형벌은 줄이고 세금은 적게 거두어야 한다
省刑罰 薄稅斂(성형벌 박세렴)"
 - 《맹자(孟子)》 중에서


맹자(孟子)는 경제정책에 큰 관심을 가진 학자였다. 그는 10%의 세금을 가장 적절하다고 여겼으며 이보다 적게 거두면 백성들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해 무질서한 사회가 되고, 이보다 많이 거두면 백성들을 괴롭히는 폭력이 되어 정권이 바뀐다고 말하며 “훌륭한 정치(仁政)란 형벌은 줄이고 세금은 적게 거두는 것(省刑罰 薄稅斂)”이라고 주장했다.
맹자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인구가 국력을 결정하는 중요한 척도였다. 인구가 많아져야 농업생산량도 늘어날 수 있었으며 노동력의 확보와 전쟁 수행을 위한 병력의 증강도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금을 많이 거두면 백성들은 주변 나라로 도망가게 되고 결국은 세금을 거둘 대상이 사라져 국력이 약해지게 된다는 것이 맹자의 주장이었다. 그러므로 주변 나라에 비해 세금을 적게 거두면 인구 증가 및 국력 신장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훌륭한 정치(仁政)’를 펼치는 게 나라에 이익이 된다는 게 맹자의 논리였다. 그러나 눈앞의 이익에 민감했던 당시 왕들은 맹자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세금 제도’에 관해서라면 조선의 4대 임금, 세종을 반드시 언급해야 한다. 1427년(세종 9), 세종은 과거시험장에 직접 나아가 시험문제를 출제하며 이렇게 말했다.
“예로부터 왕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제도를 마련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바른 정치는 백성을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므로 제도 또한 백성들의 생각이 반영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의 세금 제도는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를 개선하려고 하는데, 그 방법을 제시하라.”
이후 3년 동안 치밀한 준비를 거친 세종은 1430년, 새로운 세금 제도에 대한 안을 만들고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린다. “전국의 전·현직 관리는 물론이고 가난하고 비천한 백성(細民)들에게까지 모두 가부(可否)를 물어 그 결과를 보고하라.” 여론조사를 실시한 것이다. 이 조사는 5개월간 실시되었다. 조사 결과는 찬성이 높게 나왔다. 총 17만 2806명 가운데 찬성 9만 8657명, 반대는 7만 4149명이었다. 당시 조선의 인구는 70만 정도로 추산되는데 17만이면 전체 인구의 25%가 참여한 대규모 여론조사였다.
50% 이상의 찬성표를 얻었지만 곧바로 제도를 바꾸지는 않았다. 관료들과 치열한 토론의 시간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세종이 제안한 제도는 해마다 법으로 정해진 세금을 거두는 ‘정액제’였다. 이전의 제도는 매우 복잡했다. 매년 가을철 추수기에 관리들이 현장 조사를 통해 농사작황의 등급을 정하고, 그 작황 등급에 따라 적당한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었다.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현장 조사를 하는 관리들의 전횡이 매우 컸다. 멋대로 줄이거나 보태는 불법과 편법이 난무했고 뇌물과 뒷거래가 성행했다. 세금보다 현장 조사를 나온 관리들에 대한 접대와 뇌물이 더 큰 부담이 되었다.
제도 개혁에 대한 치열한 토론은 8년 동안 이어졌다. 1438년(세종 20년), 일부 지방부터 시범운영에 들어간 정액제는 그 효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농민들의 부담은 줄어들고 국가의 수입은 늘어났다. 이후 조금씩 수정·보완이 이루어졌다.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6개 등급으로 나누어 세율을 조정했고 해마다 풍흉에 따라 9개 등급으로 세율을 조정하는 제도도 마련했다(1444년). 세종은 부정부패를 원천봉쇄하는 제도를 마련해서 백성들의 부담을 줄였고 국가의 재정은 늘렸다.
왕정시대에도 백성들의 의견을 물었으며, 제도 하나를 바꾸는 데 10년이 넘는 시간을 필요로 했다. 우리는 현재 어떻게 하고 있는지 잘 살펴보자.
 이도환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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