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01 격주간 제916호>
[이도환의 고전산책] 이지함이 알려주는 진짜 비결
"평소 어렵게 살면서도 욕심을 내지 않았다
一平居寡欲而苦(평거과욕이고)"
-  《선조실록(宣祖實錄)》 중에서


연말연시가 되면 새해에는 어떤 일이 펼쳐질 것인지 궁금한 나머지 점(占)을 보기도 한다. 이순신 장군도 적을 앞에 두고 점을 치곤했다. 이러한 내용은 《난중일기(亂中日記)》에도 나오고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삼국지(三國志)》에 등장하는 제갈공명도 마찬가지였다. 이순신과 제갈공명도 점을 쳤는데 평범한 우리들이라고 어찌 이를 피해갈 수 있겠는가.
점(占)과 관련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친숙한 것은 아마도 《토정비결(土亭秘訣)》이 아닐까 싶다. ‘토정(土亭)’은 조선시대 학자인 이지함(李之, 1517~1578)의 호(號)를 말하는 것이니 ‘이지함이 알려주는 미래 예측’ 정도가 될 것이다.
이제는 많이 퇴색된 감이 없지 않지만 한때 《토정비결》은 ‘국민서적’으로 통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이제는 한자로 구성된 《토정비결》 책을 찾아보기도 어렵게 되었다고 하지만 인터넷 서점을 살펴보면 아직도 ‘2020년판 토정비결’ 책이 인쇄되어 판매되고 있음을 보면 그 인기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닌 모양이다.
물론 《토정비결》이 이지함이 지었다는 근거는 없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후대의 누군가가 이지함의 이름을 빌어 책을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후대의 누군가가 이지함의 호를 사용하여 책을 만들었고, 사람들은 ‘토정’이라는 이름에 기대감을 품고 이 책을 신뢰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이지함은 누구인가.
그는 점쟁이가 아니라 저명한 유학자였다. 다만 그가 태어나 활동하던 시기는 매우 어지럽고 위태로운 시기였기에 은둔하는 삶을 살았을 뿐이었다.
1494년 연산군이 즉위한 이후, 조선은 여러 면에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정치적인 격변은 각종 사화(士禍)로 이어졌고 자연재해도 연이어 일어나 농업생산량은 최악으로 떨어졌다. 권력집단으로 변화한 정치인들은 토지를 독점했고 관리들의 착취가 이어졌다.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고 급기야 임꺽정까지 등장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그러한 가운데 이지함은 벼슬길로 나아가는 것을 포기한다. 학자가 아니라 수탈자, 권력포식자가 되어가는 사대부들과 함께 하기를 거부한 것이다. 그리고 서민들 편에 서서 그들과 함께 호흡하며 생활했다. “이지함은 마포(麻浦) 나루의 한 구석에 흙을 쌓아 언덕처럼 만든 후 정자를 세워 그곳에서 살았다. 평소 어렵게 살면서도 욕심을 내지 않았고(平居寡欲而苦) 짚신만 신고 전국을 다니며 학문이 높은 선비들과 사귀었다. 그는 매우 기발했기에 사람들은 그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선조실록(宣祖實錄)에 나타난 이지함에 대한 기록이다.
그는 어렵게 살면서도 가난한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전국을 떠돌며 해박한 지식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지혜와 이익을 나눠주며 살았다. 율곡과 학문을 나눌 정도로 뛰어난 학자였지만 아주 특별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토정을 물건에 비유하면, 신기한 꽃(奇花)이요, 기이한 풀(異草)이며, 진귀한 새(珍禽)이고, 괴상한 돌(怪石)이다.” 토정에 대한 율곡의 인물평이다. 말년에 잠시 아산현감(牙山縣監)의 자리에 있을 때, 토정은 거지들을 위한 걸인청(乞人廳)을 만들어 빈민을 구제하기도 했다.
서점에서 볼 수 있는 《토정비결》은 토정의 것이 아닐 확률이 매우 높다. 그렇다면 진정한 ‘토정의 비결’은 무엇일까. 죽은 후 500년이 지나도 ‘토정’이란 이름 하나만으로 대중으로부터 신뢰를 받을 수 있었던 비결은, ‘욕심을 줄이는 것’, 과욕(寡欲)이라고 할 수 있다. 과욕(過欲)이 아니라 과욕(寡欲)임을 잊지 말자.
이도환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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