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8-01 격주간 제882호>
[이도환의 고전산책] 누가 용감한 사람인가

“부끄러움을 아는 것, 그것이 용감함이다”
知恥 近乎勇(지치 근호용)
- 《중용(中庸)》 중에서


《중용(中庸)》에서는 지(知)·인(仁)·용(勇), 세 가지를 가리켜 ‘삼달덕(三達德)’이라고 정리한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며 갖춰야할 가장 보편적인 세 가지 덕목이라는 뜻이다. 그러면서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好學)이 ‘지(知)’이며, 배운 것을 힘써 실천하는 것(力行)이 ‘인(仁)’이고, 부끄러움을 아는 것(知恥)이 ‘용(勇)’이다”라는 설명을 붙인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바로 ‘용(勇)’이다.
책을 읽고 깊게 생각하며 배운다. 그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이를 실생활에 적용하여 실천하며 몸에 익숙하게 만든다. 그때 새롭게 깨우치는 것이 있다. 책으로 읽고 머리로 생각했던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실천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도 알게 된다. 이전에 했던 공부와 이전에 이해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전부였다고 믿었던 나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바로 ‘부끄러움’을 통해 새롭게 배우는 것이다. 이전의 나를 부정하고, 이전에 이해했던 것들을 부정하고, 새롭게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용기가 없다면 ‘나만 그런 게 아니야. 다들 그렇게 하잖아? 이 정도면 괜찮은 거야’라며 자기 합리화를 해버린다. 이전의 나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부끄러움 자체를 부정해버린다. 그것을 우리는 ‘몰염치(沒廉恥)’라고 부른다. 부끄러움(廉恥)을 물 속 깊이 감추어버리는 것(沒)이란 뜻이다.
‘부끄러움을 아는 것(知恥)’은 그래서 중요하다. ‘지치(知恥)’는 ‘지지(知止)’와도 연결된다. 마구 나아가지 않고 멈출 때(止)를 알아야 한다(知)는 뜻이다. 함부로 마구 나아가는 게 용기가 아니다. 멈출 수 있는 자제력이 바로 용기라고 《중용(中庸)》은 우리에게 알려준다.
“삶의 올바른 길을 모르는 사람은 술에 취한 사람과 다르지 않다(未知道者如醉人). 술에 만취한 사람을 보라. 부끄러움이 없어지니 세상에 하지 못할 일이 없다. 그러나 술에서 깨어나면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른다. 학문을 배우고 익혀 바른 이치를 깨닫기 전에는 스스로 작은 결점도 없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학문을 배우고 익혀 바른 이치를 깨닫게 되면 달라진다. 예전의 일이 머리에 떠오르면 부끄럽고, 더 나아가 ‘내가 도대체 왜 그랬을까?’하는 생각에 놀라 두려움까지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근사록(近思錄)》에 나오는 말이다. 《논어(論語)》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군자의 허물은 마치 일식(日食)이나 월식(月食)과 같다. 잘못을 저지르면 그 어두운 구석을 모든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다. 잘못을 감출 수 없다. 이미 다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다. 잘못을 바로잡으면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며 우러러본다. 반면에 어리석은 자들은 잘못을 바로잡으려 하지 않고 그저 감추려고만 한다.”
송나라의 학자 진력(陳)은 《논어(論語)》에 나오는 이 대목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명을 달았다.
“군자는 자신의 잘못을 숨기지 않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잘못을 고쳐 바로잡는 것도 모든 사람들이 명확하게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해와 달이 일식이나 월식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바로 처음 상태의 밝음을 되찾기 때문에 그 명성에 손상을 받지 않는다. 그렇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잘못을 고치려고 하지는 않고 감추고 숨기려고만 한다. 그래서 그 잘못이 더욱 커진다.”
부끄러움을 모르고 마구 나아가는 사람이 용감한 것이라 착각하지 말자. 진실로 용감한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인정하는 사람이다. 부끄러움을 느끼며 반성하고 개선하는 사람이다.
 〈이도환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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