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7-15 격주간 제833호>
[이달의 착한나들이] 카자흐스탄을 다녀오다

우슈토베에 가면 ‘떨어져 나간 사람들’이란 조각이 있다.

비행기를 타면 내가 어디로 가는지 지도가 보인다. 여섯 시간을 날아 도착한 카자흐스탄은 낯선 미지의 나라였다. 언어도 러시아어나 카자흐어를 쓰고 70%가 이슬람교도인 나라. 이 나라는 130여개의 다민족국가다. 그 중에 고려인의 후손은 약 10만명 정도.
 21세기를 사는 나도 생소한 이 나라에 우리 조상은 어떻게 흘러와 살게 된 것일까. 나는 그것이 궁금해 고려인 최초 정착지인 우슈토베로 갔다. 그곳은 카자흐스탄 구수도인 알마티에서 버스로 5시간 거리다. 하늘과 황무지밖에 없는 곳. 인생이란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인지도 모른다. 조상들도 자신이 이곳에 와서 생을 마감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극심한 허기와 탐관오리의 수탈, 그리고 항일을 위해 연해주로 넘어간 우리 조상들은 이민자였다. 그들은 연해주에서 인종차별과 온갖 고생 끝에 농사에 성공, 삭막한 연해주를 옥토로 바꾸었다. 그리고 점점 번성해 학생 수는 2만5000명에 달했고 신문사와 조선인 잡지도 발간했다. 당시 민족들 중 가장 풍족한 삶을 누렸으나 그것도 잠시, 70년 공든 탑이 무너졌다.
 1937년 스탈린의 소수 민족 분산정책에 의해 수많은 지식인들이 총살당하고, 17만여명의 조상들은 영문도 모른 채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태워져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로 강제 이주된다. 난방이 안 되는 화물열차에 실려 한 달을 견디는 동안 산모, 어린아이, 노인이 차례로 죽어나갔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눈보라 몰아치는 허허벌판 우슈토베. 상상 불가능한 곳에 가축처럼 버려진 그들. 그들은 또다시 이민자가 되었으나 불굴의 의지로 토굴을 파서 가지고 간 볍씨를 심었다. 이민자의 절반이 죽어 나가며 중앙아시아 황무지는 젖과 꿀이 흐르는 옥토로 변했다. 그러나 그들에겐 언어도 문화도 이동의 자유도 사라졌다. 고향 가는 길도 끊어졌다.
그곳엔 1세대 할머니가 살아 계셨다. 그러나 눈도 귀도 멀어 2세대 할아버지(79세) 집을 방문했다. 집은 풍족해 보였고 부부만 살고 있었는데 자식들은 타민족과 결혼을 해 도시로 나가 살고 있었다.
그곳에서 나고 자란 후세들에게 조국이란 어떤 의미일까?
우슈토베의 중앙공원에 가면 ‘떨어져 나간 사람들’ 이란 조각이 있다. 멀리서 대각선으로 보면 떨어져 나간 부분이 하얀 길로 보인다. 그들이 우리에게 원하는 건 조국이 하나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주 150주년이었던 2012년 고려인 후손들은 자동차로 유라시아를 횡단, 러시아 국경을 넘어 북한과 남한을 이어 달리는데 성공했다. 떨어져 나가지 않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현재 그곳에서 고려인 후세들의 입지는 높다. 그들은 이민 첫해, 학교부터 세웠고 90년 넘게 고려신문과 고려극장을 지켜오고 있다.
국경을 넘어간 키르기스스탄 바닷가에서였다. 이국적인 여인이 우리에게 다가와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도라지였다. 그녀의 이름은 알비나, 고려인 3세였다. 그녀의 증조부는 연해주에서 강제로 이주됐다고 한다.
우리는 얼싸안고 반복해서 도라지를 불렀다. 그녀의 도라지는 허리가 끊어져 있었다.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 심심산천에 백도라지.
 〈김금래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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