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2-15 격주간 제871호>
[이달의 착한나들이] 말라가는 것들의 맛
속을 비우고 말라가는 가오리.

얼마 전 가족이랑 강원도 삼척에 놀러 갔다가 200년 전통을 자랑하는 동해 북평 5일장에 들렀다. 그곳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규모가 컸으며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전통시장은 늘 우리를 설레게 한다. 우리는 메밀전과 삼천 원짜리 국수를 먹고 나서 물건구경, 사람구경, 사투리구경이 쏠쏠한 시장 길을 걸었다.
그런데 시장을 돌면서 유난히 내 눈에 띄는 것은 말라가는 것들이었다. 아주 커다란 가오리가 줄에 꿰어져 구도자처럼 매달려 있는 모습이나 길바닥에 수북이 쌓여있는 시래기도 세월의 마른 향내를 풍기고 있었다. 제 살을 깎아내고 적당히 마른 곶감의 발그레한 빛깔은 신비할 정도로 맑고 투명했다. 딱딱한 감이 어찌 이리 보드랍고 기품 있게 변신할 수 있을까?
말린 것들의 영양과 맛은 날것일 때와는 비교가 안 된다. 생선은 마르는 과정에서 비린내가 사라지고 육질도 탄탄해져 더욱 맛이 깊어진다. 시래기는 암세포 증식을 억제하고 골다공증을 예방하는 건강식품이 되며, 곶감도 말라가며 떫은맛이 사라지고 단감이나 홍시보다 비타민 A가 7배나 증가한다고 한다. 잘 말라간다는 건 남을 이롭게 하는 일이다. 나는 내 안의 무엇을 비우고 무엇을 채워야 할지를 생각하며 천천히 시장을 돌았다.
네팔에서 온 모헌이란 친구가 있다. 그는 지금 안산에 있는 모 금형회사에 다니는데 놀라운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 회사 사장은 늘 이렇게 말한다고 했다. “나는 이제 늙었으니 욕심을 비우고 여러분과 함께 가진 걸 나누며 살 것이다.” 그는 그의 경영 철학대로 수입의 대부분을 직원들의 복지를 위해 쓴단다.
그 회사는 해외 노동자와 국내 노동자가 함께 일하는 회사인데 임금을 똑같이 주며, 작업장에서는 서로가 존댓말을 쓰도록 해 반말이나 거친 말투가 사라졌다고 한다. 결혼을 하면 사택을 주고 미혼이면 기숙사 생활을 하게 하는데, 부인과 함께 한국에 온 그는 뜻밖에 집이 생겼다며 매우 감동했다. 게다가 네팔에서 지진이 일어났을 때 네팔 근로자 전원에게 백오십만 원씩 나누어 주었다는 것이다. 만약 자신의 집이 피해를 입었으면 복구를 하고 무사하다면 피해를 본 이웃을 도와주라고 했단다. 나는 그 회사 사장님을 취재하고 싶어져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그는 남에게 알려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수분을 버리고 바람과 햇볕에 말라간 것들의 깊은 맛이 느껴졌다.
늙어가면서 나 아닌 누군가를 위해 집을 짓고 가진 것을 나누고자 하는 회사 사장님과 시장 바닥에서 말라가는 것들이 오버랩되는 건 나도 그 삶의 과정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시장을 돌아 나오다 약초가게를 만났다. 나는 반가운 마음으로 우슬을 샀다. 관절에 좋다는 말을 듣고 오래 전부터 끓여먹었던 우슬, 그것은 자루에 담겨있었는데 잘 말라 있었다. 나는 그것을 만져보며 새삼 건포도처럼 말라버린 어머니의 젖가슴을 떠올렸다. 나는 말라가는 것들에 의지해 살아왔던 것이다.
유행가 중에 우리는 늙어가는 게 아니고 익어가는 거라는 노래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익어가는 것보다 중요한, 말라가야하는 과정은 잊고 사는 지도 모르겠다. 〈김금래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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